정부 지원·홍보 부족, 유료방송 가입자 배제… 차상위 계층 보편적 시청권 위협
지난해 3월 이명박 대통령은 “사교육을 받지 않고 EBS 수능 강의만으로 대학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청와대 관계자는 “가난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도록 하자는 대통령의 교육복지철학을 구현하는 모델로 EBS를 선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EBS 방송을 보고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방송을 볼 수 없는 사태가 올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동일한 프로그램을 아날로그 방송과 디지털 방송으로 동시에 송출하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TV만으로도 지상파 방송 시청이 가능하지만 2012년 12월 31일 새벽부터는 디지털 수신 기기 없이는 지상파 TV 방송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재 방송중인 아날로그 TV방송을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에 종료하고 디지털화된 TV방송만을 서비스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문제는 디지털 전환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았을 뿐더러 정부의 홍보나 지원 정책이 미흡해 수백만 가구가 지상파 방송을 볼 수 없는 ‘대재앙’이 현실로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디지털 전환이 정부의 준비·홍보 부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최악의 경우 차상위 취약계층은 TV를 볼 수 없게 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디지털방송 전환 체험차량 출정식. ⓒ연합뉴스 대재앙의 대상은 252만 세대로 추정된다. 2010년 11월 통계청이 조사한 결과 지상파를 직접 수신하는 가구와 유료방송을 시청하면서도 지상파 방송 직접 수신을 병행하는 가구는 전체의 13.3%로 221만 가구로 집계됐는데 이를 세대로 환산하면 252만 세대다. 특히 유료방송에 가입하지 않고 지상파 TV 방송을 직접 수신하는 세대 중 독거노인, 장애인 등 차상위계층으로 분류된 국민에게 디지털 전환이 오히려 방송의 질을 보장하기 보다는 ‘시청자 보편권’을 흔들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주무 부서인 방송통신위원회의 지원책을 들여다보면 대재앙이 될 현실은 가까이 보인다. 정부는 소득 하위 50%에 대해서 디지털 방송 수신 기기의 비용으로 4만5천원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유료방송을 같이 보고 있는 지상파 직접 수신가구 약 73만 세대에 대해서는 지원을 하지 않는다. 취약계층이 유료방송과 지상파 TV 방송을 병행해 보고 있다면 디지털컨버터 8만원, 안테나 개보수 15만원 등 약 20만원내외의 비용을 들여 전환해야 한다.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셈이다.
정부는 또 지상파 TV 방송을 직접 수신하는 취약계층 34만 가구에게 디지털컨버터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디지털수신보조기 10만원, 정부가 지정한 디지털 TV를 구매할 때 1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지난 10월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디지털전환 취약계층 총168만 가구 중 정부의 지원을 받은 가구는 전체 0.8%인 1만2970가구에 그쳤다. 독거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지원을 받으려면 주민센터에 직접 신청해야한다는 점에서 정부 지원책이 제대로 먹혀들리 없다.
최천규 DTV코리아 전략기획실장은 “시골에서 연속극 보면서 웃고 울고 즐기는 우리 부모님들이 도시에 사는 아들한테 유료방송을 달아주라고 해야 하겠느냐”라며 정부에 쓴소리를 냈다. 홍보와 지원 부족으로 디지털 전환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유료방송 시청을 강요하는 꼴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료방송에 가입해 지상파 TV 방송을 보고 있는 91.1%의 사람들도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TV를 보유한 케이블 방송 가입자도 디지털 상품에 가입하지 않고는 아날로그 방송만 볼 수밖에 없는데 케이블 가입자의 70%가 저가형 아날로그 상품에 가입돼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전환 방송 정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국내 전체 시청 가구로 따지면 약 60%가 디지털 방송 시대에 준비가 부족한 셈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한 정부의 지원 예산도 보기 민망할 수준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12년 디지털 방송 전환 예산으로 1046억원을 책정했는데 지난 7월 디지털 방송 전환을 마무리한 일본은 4년 동안 12조원을 쏟아부었고, 지난 2009년 전환을 마친 미국의 경우도 34억 달러(3조7천억원)를 썼다.
이미 정부는 지난 6월 지상파 방송 종료 시범지역인 제주도에서 홍보와 준비 부족으로 인한 정책 실패를 경험했다. 지난 6월 29일 오후 2시 제주 지역 지상파 직접 수신가구 1만9000가구를 대상으로 아날로그 방송을 종료하자 제주 시청자지원센터에는 6천여 건의 민원이 폭주했다. 안테나와 디지털 수신기를 설치하지 않아 TV가 안 나온다는 하소연이다.
국민의 디지털 전환 인지율이 낮은 것도 걸림돌이다. 홍보가 부족하다 보니 디지털 전환 인지율(86%)은 전환 완료 2년 전 일본(98%)과 영국(90%)에 비해 현저히 낮다. 특히 낮은 인지율은 아날로그 방송 종료일을 불과 며칠 남겨놓고 대혼란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례로 2008년 아날로그 방송을 종료한 스웨덴에서는 지상파 TV 방송 직접 수신가구의 40%가 종료일 기준으로 1개월이 채 남지 않았을 때 관련기기를 구입했고, 디지털 방송 전환 성공 사례로 꼽히는 일본조차도 방송 종료 하루 전 시장에서 튜너가 부족해 정부가 미전환세대에 대해 3개월간 무료로 임대해주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자발적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전환 정책의 핵심으로 꼽히고 있어 고화질, 고음성의 방송이라는 점 외에도 다채널 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메리트’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디지털 방송 전환을 완료한 영국의 경우 BBC 수신료만 내면 시청가능한 채널이 51개에 이른다. 박병열 KBS 기술기획부장은 “디지털 전환은 비용은 들지만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 하는 일”이라며 “최소한 수신환경을 개선시키고 자발적 전환을 위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시청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진 기자 jinpress@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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