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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보 제11호] [기고문] 공유지의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2014-11-28 13;29;49

좀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공유지가 필요한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물론 공유지(commons)라는 개념은 우리 언어생활에서 그렇게 일상적(common)이지는 않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별 생각없이 땔감을 하고, 소 먹일 꼴을 베고, 그물을 드리우고, 나무에서 감을 따던 모든 곳이 사실상 공유지였다. 사유재산이나 국유재산의 공개적 이용을 고맙게도 소유주들이 허락해주어서이기도 했고, 별 생각 없이 방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사회는 내것과 네것의 구별이 그리 명확하지 않은 사회였고,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까운 곳에 다양한 종류의 공유지(들, 산, 바다, 공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의 물결은 우리 주변에서 공터를 없앴고, 현대판 인클로져를 경험하게 했다. 공터는 일단 ‘노는 땅’으로 바뀌었으며, 그 노는 땅들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수익을 실현해주는 (혹은 언젠가는 실현해줄) 땅으로 전환됐다. 동네 뒷산에서 영글어 떨어진 밤을 따는 행위는 옆집 밤농장에 속한 사유재산을 침탈한 도둑질이 되었다.

다행히도 그 숨가쁜 산업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급속히 사라져가는 공유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메마른 여의도 광장 아스팔트가 여의도공원의 흙과 잔디밭으로 바뀌었고, 복개했던 청계천을 열어 수돗물을 흘려보내기로 결정한 어떤 서울시장은 그 탄력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널널했던 공유지에서 빡빡한 사유지로 재구획됐던 제주도의 밭과 산 사이로 올레길이라는 신개념의 공유지가 어렵사리 열렸고, 그것의 외부효과(externalities)는 사그러들던 제주도 관광산업 부흥에 결코 작지 않은 힘을 보탰다. 하지만 언제나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전임시장의 성공을 보고 고무된 후임시장은 서울 강북의 고궁에서 세운상가를 거쳐 한강과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녹지 축을 조성하여 이른 바 ‘바람의 길’을 내겠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고꾸라진 한강 르네상스 계획과 세운상가 근처에 몇 뙈기 땅을 모아 열어놓은 ‘세운초록띠공원’의 작은 논이었다. 정치적인 야심에 어설픈 환경의식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망작이라는 점도 문제지만, 이미 고도로 사유화가 진행되어 있는 공간을 재공유화한다는 것은 선한 의지 외에도 강력한 추진력과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주파수는 공공자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파수 대역을 이용할 권리는 공공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질적으로 비배제성을 띠고 있긴 해도, 완전한 공공재(public goods)가 되기에는 경합적 성격이 강한 탓에 공유재(common goods)로서 공공의 개입과 관리를 요한다. 혹자는 방송의 공익성 개념이 근거하고 있던 ‘주파수 희소성’은 이미 기술적으로 깨져버렸으므로 방송의 공익성이란 철지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또 많은 부분에서 틀린 주장이다. 방송의 공익성이 의문시되는 것은 주파수의 희소성이 해소됐기 때문이 아니라, 주파수를 방송 및 기타의 용도로 활용하면서 국가와 시장이 모두 막대한 수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주파수를 경매에 붙이면 세금으로는 쉽게 거둘 수 없는 막대한 재정이 확보된다. 주파수를 이용권을 불하받아 통신사업을 벌이는 주체들은 낸 돈 이상의 훨신 더 막대한 수익을 시장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파수에 대한 배타적 이용권을 국가로부터 사들인다. 주파수는 완전히 사유재가 되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 활용하여 수익을 거두는 것이 당연한 자산이 되었다. 한번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나면 되돌리는 것은 정말 어렵다. 사람들은 세운상가 앞의 어설픈 논을 다시 걷어치우고 차라리 거기에 건물을 지어 임대사업을 벌이는 게 낫다고 말하게 될 테니까. 거기서 벌어들인 임대료 수입 덕분에 우리 호주머니에서 당장 세금이 덜 나가면 더 좋은 거 아니냐고 할 테니까.

어쩌면, 한국에서 지상파 방송은 장기적으로 보아 그 세운초록띠공원 수준으로 위축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적어도 북서울 꿈의 숲이나, 최소한 청계천만큼의 규모와 기능을 확보해야 현재와 미래의 외부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법인데, 경제적 가치로는 ‘금싸라기’지만 실제적으로는 제대로 된 무언가를 도모하기 어려운 입지를 확보한 채, 끊임없이 부대사업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사회적 의의는 물론 재정적 기초도 확보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어느새 ‘공유지’ 하면 ‘비극’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붙어 떠오르는 대단히 시장주의적인 분위기를 띠게 됐지만,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얼마든지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극단적으로 사유화되어 자원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반공유지(anticommons)’의 비극도 있고, 제대로 설치되어 관리된 공유지가 미래를 위한 개방과 혁신의 전거로서 사회적 풍요를 빚어내는(wealth of the commons) 기초가 되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국내 지상파 방송의 현실이 지금처럼 축소되고 있는 것에는, 기술의 자연스러운 진화라는 요인도 작동하고 있지만, 정책의존적 기구의 흥망성쇠를 상당 부분 관장하는 정부의 ‘의도적, 비의도적 방기’라는 요인이 더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인식이다. 요컨대, 과거와는 달리 구축과 관리가 현격하게 어려워진 공유지 개념에 기초하여 주파수와 국내 미디어 서비스 이슈에 접근하기보다는, 실적과 편의성이 두드러지는 시장주의적 경매 방식과 변형된 조세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난점을 해결하려는 정책집단의 문제가 적지 않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와 같은 정부의 행위를 두고, ‘안 보이는 탈규제(stealth deregulation)’를 통해 은밀히 (공공서비스) 지상파 방송을 죽이려는(death by stealth) 시도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무책임한 태도는 모든 주체에게 공익성을 요구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공익실현의 주체와 방식을 어느 정도 구획해주지 않으면 공익 실현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진 현재의 조건에 손놓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그뿐 아니라, 좀 더 시장적이고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아무런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한 정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장의 한계는 물론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버린 국내 미디어 산업은 유료 서비스가 수익성 높은 상위시장을 지향하지 못하고, 무료 서비스가 제대로 된 기초적 서비스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상호구속의 상황에 처해있다. 과연 정부와 행위자들은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혁신적’ 시도를 구상해왔던가?

이제는 지상파 방송이 단순히 소수의 개별 공영 혹은 민영 사업자에게 나눠준 ‘독과점적 사업권’으로서가 아니라, 국내의 보편적인 미디어 서비스가 시작되는 물리적 기초로서 공공 플랫폼으로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방송(broadcast)은 본질적으로 비배제적이고 비경합적인 대상으로서 공공재적 특성을 견지하고 있지만, 지상파를 이용한 방송은 일정한 경합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공유재로서 관리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과거에 방송이라고 불렀던, 혹은 방송에 의해 실질적으로 독과점됐던 시청각 미디어 서비스(audio-visual media service)가 엄청나게 다양한 주체와 형식을 통해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사유재에서 공공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이 생겨났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바로 그 때문에라도, 관리된 공유지로서의 지상파 방송 플랫폼을 명확히 규정하고, 이와 같은 플랫폼에 기초를 둔 행위자들이 담당해야 할 공적 책무를 구체화함은 물론, 이들의 책무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지속 가능한 재원과 기술 혁신의 여지를 허용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공유지만이 희망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공유지 없는 희망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기사는 협회보 제11호 3면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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