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대로 지상파 방송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 같다’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지상파방송 사장단이 만나 지상파 커버리지를 높이고 난시청 해소 및 수신환경 개선을 하기로 약속한 지 불과 한 달 정도 지났는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내용인즉 UHD방송 도입과정에서 지상파 방송의 우선적 권리가 배제되는 정책이 곧 현실화될 것이기 때문에, 지상파 방송은 HD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게 웬 뒷북인가 싶다. 사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지상파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것일 수 있으나, 이용자들에게는 아주 오래된 과거이자 현실이고 미래이기도 하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아날로그 환경에서 난시청 해소 의무를 당당하게 내버려왔고 정책기관은 이를 공공연하게 방조해왔다. 이에 국민 대다수는 유료방송을 경유하지 않으면 방송을 볼 수 없다는 공고한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지상파 플랫폼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송수신 인프라가 새롭게 구축되면서 공동주택은 물론이거니와 개별주택에서도 지상파 TV를 고화질 무료방송으로 볼 수 있도록 수많은 비용이 투입되었지만, 안정적 수신을 신뢰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이를 둘러싼 정책환경은 더욱 녹록지 않다. 보수정권은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채널이 동일시될 수 있는 유료방송 플랫폼 중심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산업적으로도 케이블과 위성, IPTV까지 더해진 경쟁시장에 무료 플랫폼을 다시 진입시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낙하산 논란의 주체인 지상파 사장단들이 이러한 문제에 저돌적으로 대응하기도 쉽지 않다. 이는 8VSB(지상파디지털전송방식), DCS(접시 없는 위성방송), 클리어쾀 등 새로운 기술에 기반을 둔 방송서비스 도입과 관련해 기술 중립적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현 정부에서 유독 지상파 무료 다채널 서비스, 뉴미디어 플랫폼 도입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지상파 직접수신가구 비율이 10% 미만인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지상파 방송이 사용하는 주파수를 반납하고, 직접 수신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별도의 시스템을 도입해 사회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주파수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라는 논의를 내놓고 있다. 이는 700㎒ 주파수를 선점하고자 하는 통신업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라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영 설득력이 없는 논리도 아니다. 주파수를 제대로 쓰든지 아니면 접든지 하라는 명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지상파 방송사들의 인식은 안일하기 그지없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신규 서비스 도입에서 우선권이 배제되고 있는 것에 발끈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실효성 있는 무료 플랫폼 복원 종합 계획을 통해 국민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역할 그림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개별 방송사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이기적인 대안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상파 방송의 존립 그 자체를 담보할 수 있는 상생의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 주파수와 관련된 어떤 사회적 명분도 성립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가지는 권한과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지상파 플랫폼이라는 공공 영역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업영역의 일탈을 제어할 수 있는 견제장치이며,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줄 수 있는 창구일 수 있다. 공공영역은 정치적 부침과 상관없이 국민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외면할 수 없다는 태생적 근거를 가진다. 이 때문에 이러한 공공영역이 공고히 구축될 때 비로소 현 정부가 꿈꾸는 전면적인 규제 완화의 설 자리도 존재하는 것이다.
상업영역 간의 경쟁만 남게 되는 시장에서 콘텐츠의 가치가 존중되고 이용자의 권리가 보호될 수는 없다. 이는 다양한 매체가 공존하는 스마트환경에서도 공공서비스, 보편적 서비스는 더욱 안정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부디 조속히 종합 계획이 마련되어 이를 지지할 수 있는 환경이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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